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문단 편집) == 다각 외교의 전망 == 차우셰스쿠 정권은 대외 정책에서 전임자보다도 더욱 선명한 자주적 노선을 주창하였다. 코메콘 내부에서의 국가 주권 옹호의 주장은 이번에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의해 논의되었다. 1965년 1월의 바르샤바 기구 정치 자문회에 있어서 루마니아는 소련의 상설 위원회 설치 제안에 반대했고, 9월부터 10월에 걸쳐 교섭이 분주히 진행되었다. 1966년 5월 7일에 차우셰스쿠는 당 창립 45주년 기념 식전에서 "루마니아 공산당은 나라의 독립과 루마니아 민족 및 통일, 민족 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한다. ······ 루마니아 국민은 수 세기에 걸친 투쟁의 계승자이다." 라고 말하고, 코민테른을 비판함과 동시에 '군사 블록 반대'의 입장을 명확하게 했다. 1967년 1월에 루마니아는 동독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독과 국교를 수립하고, 4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유럽 공산당 대회에 불참하였으며, 6월의 중동전쟁에 관해서 소련 및 여타 동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등 자주 노선의 입장을 단호하게 표명하였다. 중소 대립에 관해서도 루마니아는 소련이 주도한 공산 중국 탄핵을 위한 국제 회의에 반대하는 한편, 서방측 제국과의 정치적, 경제적 접촉은 게오르기우데지 정권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루마니아의 수출입에서 차지하는 소련의 비중은 1960년 40.1%, 1965년 38.8%, 1967년의 28.2%로 해마다 감소되었다. 1968년의 체코에의 군사 개입 때에 당 중앙 위원회와 정부는 즉각 합동 회의를 열어 군사 개입을 '내정 간섭'으로 강력히 비판했으며, 이때에 노동 조국 방위대가 루마니아 국내에서도 결성되었다. 그 후, 소련이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전에 루마니아는 후퇴하여 1969년 봄에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 합동 훈련에 참가하고, 6월의 세계 공산당 대회에도 대표를 보내어 유보로서 회의의 문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같은 해 8월에 루마니아는 닉슨 미국 대통령을 초대하여 암암리에 소련을 견제했다. 그 직후에 열린 제10차 공산당 대회에서 차우셰스쿠는 당의 지도권과 당내 민주주의의 강화, 신 5개년 계획의 요점, 과거 숙청에 대한 게오르기우데지의 책임 등에 관하여 연설하면서 "조국의 방위는 모든 시민의 의무이다."라고 강조했다. 1970년 7월에, 1968년 2월 이후 소멸된 소련과 루마니아의 신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고, 대소 관계는 한때 개선되었다. 차우셰스쿠의 1970년 6월 프랑스 방문, 10월의 미국 방문, 1971년 6월 중국 방문에서 보여지는 것 같이 루마니아의 다각적 외교 노선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공산주의 동유럽 국가의 다원화의 가능성의 길을 열어 주는 데 어느 의미로 매우 기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